왜 '그림 그리기'가 연구 대상이 되는가
크레용을 꽉 쥐고 종이 위에 힘차게 선을 그어 나가는 아이의 모습. 흐뭇한 일상의 한 장면이지만, 사실 이 '그림 그리기'라는 행위에는 아이의 발달을 다방면으로 지탱하는 힘이 있다는 것이 수십 년간의 학술 연구를 통해 밝혀져 왔습니다.
이 글에서는 국내외 논문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그림 그리기가 아이의 인지·정서·운동·사회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그 작품을 보존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아봅니다.
인지 발달과 그림 그리기 -- 두뇌를 키우는 선과 색
그림은 인지 발달의 '창'이다
발달심리학자 빅터 로웬펠드(Viktor Lowenfeld)는 저서 Creative and Mental Growth(1947년 초판, Brittain과 공저로 1987년 제8판)에서 아이의 그림이 인지 발달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체계적으로 제시했습니다. 로웬펠드는 아이의 그림이 단순한 기술 향상이 아니라 사고력·공간 인식·추상화 능력의 성장을 반영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00만 장의 그림이 말해주는 보편성
미국 심리학자 로다 켈로그(Rhoda Kellogg)는 전 세계 아이들의 그림 100만 장 이상을 수집·분석하여 1969년 Analyzing Children's Art를 출간했습니다. 켈로그의 연구에서 주목할 점은 문화나 국적에 관계없이 아이들이 공통된 20가지 기본 낙서 패턴에서 시작해 점차 만다라나 태양 모양 등의 도형으로 발전시켜 나간다는 발견입니다. 이는 그림 그리기가 문화적 학습이 아니라 인간의 두뇌에 내재된 발달 과정의 일부임을 시사합니다.
뇌과학이 뒷받침하는 예술 창작의 효과
2014년 볼베르크 등(Bolwerk et al.)은 시각 예술 창작이 두뇌에 미치는 영향을 fMRI(뇌 활동을 영상화하는 기술)로 조사했습니다. PLOS ONE에 게재된 이 연구에서는 10주간 예술 창작 활동에 참여한 그룹에서 뇌 내 네트워크 간 연결성이 유의하게 강화되었다는 결과가 보고되었습니다. 이 연구의 대상은 고령자였지만, 예술 창작이 스트레스 내성과 사고의 유연성을 높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발견입니다.
그림 그리기와 학업 성적의 관계
2023년 npj Science of Learning(Nature 계열지)에 게재된 에가냐-델솔(Egana-delSol)의 연구에서는 고등학생이 예술 프로그램에 지속적으로 참여했을 때 학업 성적에 미치는 영향을 검증했습니다. 그 결과, 최소 2학기 워크숍에 참여한 학생은 국어 성적이 크게 향상되었고 수학 성적에서도 개선이 나타났습니다. 이 연구는 고등학생 대상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예술 활동에 친숙해지는 것이 인지 능력의 기초를 다지는 데 도움이 된다는 증거 중 하나입니다.
정서 발달과 그림 그리기 --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
말로 담을 수 없는 감정의 '출구'
아이, 특히 어린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말로 충분히 표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미술 치료의 선구자 캐시 말키오디(Cathy Malchiodi)는 Understanding Children's Drawings(1998년)에서 그림은 아이에게 비언어적 감정 표현의 중요한 수단이라고 서술했습니다. 기쁨, 불안, 분노, 슬픔 -- 아이들은 이러한 감정을 자연스럽게 그림에 투영하며, 그 과정을 통해 내면을 정리합니다.
그림을 통한 기분 조절 효과 실증
보스턴 칼리지의 심리학자 드레이크와 위너(Drake & Winner, 2012)는 슬플 때 그림을 그리면 기분이 나아지는지를 실험적으로 검증했습니다. Psychology of Aesthetics, Creativity, and the Arts에 발표된 이 연구에서는, 슬픈 사건을 떠올린 후 슬픔과 관계없는 즐거운 것을 그린 그룹이 슬픈 사건 자체를 그린 그룹보다 기분 회복이 훨씬 빨랐습니다. 그림 그리기에는 기분을 전환하는 힘이 있어, 아이의 감정 조절을 돕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운동 기능 발달 -- 작은 손이 키우는 큰 힘
낙서는 운동 학습의 과정
언뜻 보면 무질서해 보이는 유아의 낙서에도 운동 발달상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어와 록맨(Greer & Lockman, 1998)은 Child Development에 발표한 연구에서 유아의 낙서 패턴이 발달에 따라 체계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처음에는 어깨에서 팔 전체를 사용하는 큰 동작이었다가, 점차 손목과 손끝의 세밀한 조절로 이행합니다.
글씨 쓰기의 토대가 되는 그림 그리기
크레용이나 연필을 쥐는 동작은 이윽고 글씨를 쓰기 위해 필요한 미세 운동(파인 모터) 기술의 기초가 됩니다. 연필 잡는 방법의 발달(주먹 쥐기에서 삼점 잡기로의 전환), 손과 눈의 협응 운동, 종이 위 원하는 곳에 선을 긋는 제어력 -- 이 모든 것이 매일의 그림 그리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단련됩니다. 취학 전 그림 그리기 경험이 풍부한 아이일수록 글씨 쓰기로의 전환이 수월하다는 보고가 많은 교육 현장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회성·커뮤니케이션 능력 발달
그림은 대화의 촉매제
영국 연구자 캐시 링(Kathy Ring, 2006)은 아이의 그림 활동을 가정과 학교 양쪽에서 관찰하여, 그림 그리기가 단순한 개인 활동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갖는 사회적 행위임을 밝혔습니다.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면서 친구와 대화하고, 그림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공유합니다.
부모-자녀 유대를 강화하는 공동 체험
"이건 뭘 그린 거야?" "이 사람은 누구야?" -- 아이의 그림을 계기로 한 부모-자녀 대화는 **공동 주의(joint attention)**라 불리는, 발달적으로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형태입니다. 아이는 자기 그림에 대해 설명하면서 어휘력과 표현력을 키우고, 부모는 아이의 내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습니다.
그림 그리기가 가져다주는 성공 체험 -- 자기효능감과 인생에 미치는 영향
'해냈어!'가 키우는 자기효능감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Albert Bandura)는 자기효능감 이론(1977년, 1997년)에서 '나는 할 수 있다'는 믿음인 자기효능감이 행동과 성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반두라가 밝힌 자기효능감의 네 가지 원천 중 가장 강력한 것이 '성취 경험(mastery experience)' -- 실제로 무언가를 해낸 경험입니다.
그림 그리기는 아이가 일상적으로 성취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귀중한 활동입니다. 선을 그을 수 있었다, 동그라미를 완성했다, 사람 얼굴을 그렸다 -- 작은 '해냈어!'의 연속이 자기효능감을 키우고, 새로운 과제에 도전하는 의욕과 끈기의 기반을 만듭니다.
성장을 '눈으로 보고 실감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
그림 그리기가 다른 놀이와 크게 다른 점은 성장 과정이 작품으로 남는다는 것입니다. 1살의 낙서, 3살의 머리발 사람, 5살의 이야기가 담긴 그림 -- 과거 그림과 현재 그림을 나란히 놓으면 아이 스스로 '전보다 잘하게 됐어', '이렇게 많이 변했어'라고 성장을 시각적으로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이 '성장의 시각화'는 스탠퍼드 대학교 심리학자 캐럴 드웩(Carol Dweck, 2006)이 제창한 **성장 마인드셋(growth mindset)**의 형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능력은 노력으로 키울 수 있다고 믿는 아이는 어려움에 직면해도 쉽게 포기하지 않으며, 학업과 사회생활에서 더 높은 성과를 거두는 것으로 많은 연구에서 나타났습니다. 과거 작품이 남아 있으면 '노력하면 성장할 수 있다'는 실체험에 기반한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창의성이 미래 성공을 예측한다
미시간 주립대학교의 루트-번스타인 등(Root-Bernstein et al., 2008)은 Journal of Psychology of Science and Technology에 발표한 연구에서 노벨상 수상 과학자와 미국 국립과학원 회원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뛰어난 과학자는 일반 과학자에 비해 어린 시절부터 청소년기에 걸쳐 미술이나 공작 등 예술 활동에 종사한 경험이 유의하게 많았습니다. 창의적 예술 활동을 통해 길러진 확산적 사고, 패턴 인식, 유연한 문제 해결력이 이후 과학적 성공의 토대가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50년간의 추적이 증명한 창의성의 예측력
창의성 연구의 선구자 E. 폴 토런스(E. Paul Torrance)는 1958년부터 초등학생의 창의성 테스트를 시작하여 이후 50년간 추적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런코 등(Runco et al., 2010)의 최종 보고에서는 어린 시절 측정된 창의적 잠재력이 성인 이후의 개인적 창의적 성취와 유의하게 관련되어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나아가 가이다 등(Gajda, Karwowski & Beghetto, 2017)이 120개 연구·약 5만 3천 명의 데이터를 통합한 메타분석에서도 창의성이 높은 아이일수록 학업 성적도 좋은 경향이 있다는 것이 통계적으로 확인되었으며, 특히 언어적 창의성과의 관련이 강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몰입(플로) -- 깊은 집중에서 얻어지는 성장의 가속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 1990)는 '몰입(플로)' -- 활동에 완전히 빠져 시간 감각을 잊을 정도의 최적 체험 상태 -- 이 인간의 성장과 행복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림 그리기는 적절한 도전과 즉각적 피드백(그린 것이 바로 눈에 보인다)을 겸비한, 아이가 몰입 상태에 들어가기 쉬운 대표적 활동입니다. 몰입 체험을 반복하면서 집중력, 내재적 동기 부여, 그리고 활동 자체에서 얻는 충실감이 강화됩니다.
아이의 그림을 '보존하는' 것의 과학적 의미
가족의 이야기로서의 미술
발달심리학자 로빈 피부시(Robyn Fivush, 2008)는 Memory Studies에서 가족이 공유하는 이야기(패밀리 내러티브)가 아이의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아이의 그림은 이러한 가족 이야기의 소중한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3살 때 이런 그림을 그렸지', '이 그림은 할머니 댁에서 그린 거야' -- 작품과 연결된 에피소드를 나누면서 가족의 기억이 공유되고, 아이의 자기 인식이 풍요로워집니다.
그림 그리기와 자아존중감 -- 6,209명의 대규모 조사
맥과 팬코트(Mak & Fancourt, 2019)는 영국 밀레니엄 코호트 연구에 참가한 6,209명의 아이를 대상으로 예술 활동과 자아존중감의 관계를 조사했습니다. Annals of the New York Academy of Sciences에 게재된 이 연구의 중요한 발견은 그림 그리기나 색칠하기 등 시각 예술 활동에 참여하는 아이는 11세 시점에서 더 높은 자아존중감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교사의 능력 평가는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며, 그림의 '잘 그리는 정도'와 관계없이 활동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작품을 '전시하는 것'만으로도 자아존중감이 향상된다 -- 일본의 실증 연구
일본의 칭찬 사진 프로젝트(2018년, 교육 평론가 오야노 지카라(親野智可等), 시노하라 기쿠노리 교수(공립 스와 도쿄 이과대학), 이와타테 교코 교수(도쿄 가쿠게이 대학) 등)는 32가정을 대상으로 아이의 사진이나 작품을 가정 내에 전시하는 효과를 3주간 검증했습니다. 그 결과, '자신에 대한 만족도'가 65%에서 90%로 상승하였고, NIRS(근적외선 분광법)에 의한 뇌 기능 측정에서는 자신의 사진이나 작품을 볼 때 우전두엽의 활성화가 확인되었습니다. 아이의 그림을 전시하는 일상적 행위가 자아존중감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귀중한 일본 연구입니다.
'소중히 여겨지고 있다'는 메시지
아이의 작품을 보존하고 전시하며 소중히 여기는 행위는 아이 자신의 표현을 존중하고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됩니다. 자기결정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의 틀에서 보면, 이는 아이의 자율성과 유능감을 지원하는 방식이며, 내재적 동기 부여 -- '더 그리고 싶다', '더 표현하고 싶다'는 의욕 -- 를 키우는 토양이 됩니다.
종이에 그린 그림은 언젠가 색이 바래고, 보관 공간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디지털화하여 보존하는 방법도 있지만, figmee처럼 아이의 그림을 3D 피규어로 입체화하면 작품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으면서 '네 그림을 소중히 여기고 있어'라는 메시지를 더 구체적인 형태로 전할 수 있습니다.
결론
수십 년간의 학술 연구는 그림 그리기가 아이의 인지 발달·정서 발달·운동 발달·사회성 발달이라는 성장의 근간을 동시에 지탱하는 매우 중요한 활동임을 보여줍니다.
나아가 그림 그리기는 일상적인 성공 체험을 통해 자기효능감을 키우고 성장 마인드셋 형성에도 기여합니다. 그리고 그 작품을 '보존하는' 것을 통해 아이는 자신의 성장을 실감하고, '노력하면 성장할 수 있다'는 확신을 깊게 합니다. 어린 시절의 창의적 체험이 미래의 성공을 예측한다는 연구 결과는 그림 그리기와 그 작품의 보존이 아이의 인생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아이가 오늘 그린 한 장의 그림은 과학이 증명하는 '성장의 증거' 그 자체입니다. 그 그림을 손에 들고, 무엇을 그렸는지 물어봐 주세요. 그리고 그 그림을 소중히 보관해 주세요. 거기에는 숫자로는 측정할 수 없는 풍부한 발달의 이야기와 미래의 가능성이 담겨 있습니다.
참고 문헌
- Lowenfeld, V. & Brittain, W. L. (1987). Creative and Mental Growth (8th ed.). Macmillan.
- Kellogg, R. (1969). Analyzing Children's Art. National Press Books.
- Malchiodi, C. A. (1998). Understanding Children's Drawings. Guilford Press.
- Drake, J. E. & Winner, E. (2012). Confronting sadness through art-making: Distraction is more beneficial than venting. Psychology of Aesthetics, Creativity, and the Arts, 6(3), 255-261.
- Bolwerk, A., Mack-Andrick, J., Lang, F. R., Dörfler, A., & Maihöfner, C. (2014). How art changes your brain: Differential effects of visual art production and cognitive art evaluation on functional brain connectivity. PLOS ONE, 9(7), e101035.
- Fivush, R. (2008). Remembering and reminiscing: How individual lives are constructed in family narratives. Memory Studies, 1(1), 49-58.
- Greer, T. & Lockman, J. J. (1998). Using writing instruments: Invariances in young children and adults. Child Development, 69(4), 888-902.
- Ring, K. (2006). What mothers do: Everyday routines and rituals and their impact upon young children's use of drawing for meaning making. International Journal of Early Years Education, 14(1), 63-84.
- Bandura, A. (1997). Self-Efficacy: The Exercise of Control. W.H. Freeman.
- Dweck, C. S. (2006). Mindset: The New Psychology of Success. Random House.
- Root-Bernstein, R., Allen, L., Beach, L., Bhadula, R., Fast, J., Hosey, C., ... & Pawelec, K. (2008). Arts foster scientific success: Avocations of Nobel, National Academy, Royal Society, and Sigma Xi members. Journal of Psychology of Science and Technology, 1(2), 51-63.
- Csikszentmihalyi, M. (1990). Flow: The Psychology of Optimal Experience. Harper & Row.
- Egana-delSol, P. (2023). The impacts of a high-school art-based program on academic achievements, creativity, and creative behaviors. npj Science of Learning, 8, 39.
- Mak, H. W. & Fancourt, D. (2019). Arts engagement and self-esteem in children: Results from a propensity score matching analysis. Annals of the New York Academy of Sciences, 1449(1), 36-45.
- 칭찬 사진 프로젝트 (2018). 사진과 작품 전시가 아이의 자아존중감에 미치는 효과 검증 연구. 칭찬 사진 프로젝트 연구 보고서.
- Runco, M. A., Millar, G., Acar, S., & Cramond, B. (2010). Torrance tests of creative thinking as predictors of personal and public achievement: A fifty-year follow-up. Creativity Research Journal, 22(4), 361-368.
- Gajda, A., Karwowski, M., & Beghetto, R. A. (2017). Creativity and academic achievement: A meta-analysis. Journal of Educational Psychology, 109(2), 269-299.
